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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11] ~ [20] (2010. 2. 21 ~ 3. 5)
이적의 트위터 짧은 픽션 [11] ~ [20] (2010. 2. 21 ~ 3. 5)


[11]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은 이미 뇌사 상태란 걸. 오래된 습관과 미련, 주저함과 비겁함에 기대 억지로 연명하고 있단 걸. 허나 우리 손으로 플러그를 뽑을 순 없었다. 그저 가녀린 숨이 스스로 끊어질 날을 기다릴 뿐. 무기력하게.


[12] 딱! 소리와 함께 중견수는 뛰기 시작했다. 숙련된 야수는 소리만 듣고도 낙구지점을 안다 했던가. 펜스까지 달려가 몸을 틀었을 때 그는 한참 앞 2루수 뒤로 맥없이 떨어지는 공을 보았다. 다음날 훈련을 빠진 그, 쓸쓸히 보청기를 맞추러 가는데.


[13] 읽지도 않으면서 그녀는 더 많은 책을 주문했다. 사방의 책장에 책을 꽂아 넣고 그 제목들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새 이야기를 위해서 책의 배열을 바꿨고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새 책을 주문했다. 그녀는 서재를 읽고 있었다. 그 방의 이야기를.


[14] 몹시도 추운 날, 끊이지 않는 한숨은 입김이 되고, 입김은 안개가 되어 그녀를 감쌌다. 모든 것이 얼어붙으려는 순간, 더운 한숨만이 그녀를 안아 겨우 숨 쉴 수 있게 했다. 절망이 구원이 되어버려, 한숨은 더 깊어지고, 삶은 또 이어지고.


[15] “음악은 사냥하고 달라. 저기 뛰어가는 멜로디를 발견하고 잡는 게 아냐. 병아리를 키우듯 공을 들여야 해. 다 자라면 멜로디를 낳지. 근데 그게 영원하지 않아. 더 이상 낳지 못하게 되면 끝이야.” 왕년에 작곡가였다며 떡볶이아저씨가 말해줬다.


[16] 그는 늘 라디오를 켠 채 들고 다녔다. 이어폰 없이. 그에겐 선행을 베푸는 일과 같았다. 남들도 고요를 못 견딜 거라 믿었기에. 마침내 그가 살해당해 버려졌을 때, 라디오는 배터리가 닳을 때까지 방치된 시신을 지켰다. 고요는 다시 유예되었다.


[17] "반포대교 위에서 그 여잘 봤어. 중앙선을 따라 걸으며 춤을 추고 있던. 내 차 옆거울이 그 여자 팔을 친 것 같아 뒤를 봤더니 전혀 개의치 않고 춤추고 있는 거야. 헌데 말이지. 차들이 좌우로 지날 때마다 그 여자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어."


[18] "사과벌레가 사과 하나를 관통하는데 평생이 걸린다면, 사과벌레에겐 지옥 같을까. 천국 같을까." 비가 오고 있었다. "사과벌레에게 세계는 사과와 사과 아닌 것으로 나뉠까. 아님 사과 이외의 것은 인식조차 되지 않을까." 그의 잔이 또 비었다.


[19] 수도꼭지 끝에 매달린 물방울은 필사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 버텼다. 그는 몰랐다. 그 또한 먼저 떨어진 물방울 덕에 서서히 물방울로 자라났음을. 그가 떠난 뒤에 역시 그와 닮은 물방울 하나가 같은 자리에 자라날 것임을. 낙하의 순간이 다가온다.


[20] "완전한 어둠을 보고 싶어. 어설픈 것 말고." 그녀를 위해 집안에 암실을 만들었다. 그녀를 들여보낸 뒤 문을 닫았다. 잠시 후 비명이 들렸다. 문을 열자 땀에 젖은 그녀가 뛰어나와 소리쳤다. "이래서야 아무것도 볼 수 없잖아! 어둠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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