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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달? 뭐가 그렇게 급해?”

  기한이 묻자 다로가 끼어들었어.

  “뉴스 못 봤냐. 신문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터넷뉴스라도 좀 봐라. 허구한 날 게임만 쳐하지 말고. 하여간 이 새끼, 멍청한 건 여전해가지고.”  

  기한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어.

  “뭐, 이 새끼야!”

  그렇다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냐. 그냥 오래된 장면이 반복되는 것일 뿐. 이쯤에서 내 대사가 나올 차례야. 이거 오랜만에 역할놀이를 하려니 반갑기까지 하더군. 난 앉은 채로 허공에 손을 내저었어.

  “앉아봐. 인지가 설명할 거야.”

  기한이 괜히 바닥을 한번 구르더니 자리에 앉았어. 이런 패턴이야. 다로는 기한의 유일한 약점인 약간 떨어지는 지적능력을 조롱하고, 기한은 어김없이 발끈하고. 지치지도 않는지. 허긴 다로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냐. 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잘 생긴 녀석 앞에서 무릎 꿇고 주눅 들지 않으려면 한순간이라도 공격의 끈을 늦추면 안 돼. 어떻게든 기한의 맹점을 찾아내 신은 공평하다는 착각을 스스로에게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자살충동을 견딜 수 없게 될 테니. 해서 나, 좀 비겁하지만, 다로의 도발을 한번도 적극적으로 저지한 적이 없어. 여자인 인지가 그 마음을 과연 이해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소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었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CD를 생산하고 있던 진안실업이 앞으로 두 달만 더 CD를 찍겠다고 발표했어. 그게 며칠전 뉴스에 나왔어.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다로랑 둘이 도진이를 찾아갔고, 도진이가 너한테 연락한 거야. 도진이가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침착한 인지의 어조에 흥분이 가라앉았어. 기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지.

  “CD를 안 찍는다고? 그럼 그게...”

  “이제 CD로 음반을 낼 일이 없어진다는 거야. 어차피 요즘 CD 내는 선수 자체가 거의 없긴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거지. 너도 알잖아. 그나마 남아있던 유일한 CD플레이어였던 PC의 CD롬 드라이브조차 요새 안 붙어 나오는 거. 크기만 차지하고 용량은 턱없이 적고. 이 시대에 그렇게 원시적인 저장매체를 사용하려는 시대착오적인 인간이 어디 있겠니. 그래서 생산이 점점 줄다가 이제 끝나려 하는 거야.”

  인지의 말투엔 특별히 유감스럽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었어. 그저 담담히 사실을 서술하고 있을 뿐. 기한은 여전히 상황이 잘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었어.

  “그거랑 우리 앨범이랑 상관이 있는 거냐?”

  “어떤 사람들은 CD가 사라져도 매체만 달라질 뿐 앨범이라는 형식은 계속 존재할 거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파일로 음악이 돌아다닌다면 열 몇 곡이 담기는 앨범 형식은 아무 의미가 없어. 원래 앨범이란 것은 LP의 등장과 함께 생겼고, 시간적인 제약 역시 기술적인 저장용량에 의해 규정지어진 거거든. CD로 바뀌면서 저장 시간이 약간 늘긴 했지만 여전히 70여분이라는 한계 속에서 앨범을 만들었지. 그래서 곡수도 대충 비슷하게 정해졌던 거고. 하지만 이게 그냥 파일로 바뀐다면 그런 기술적인 한계는 모두 사라지게 되지. 앨범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애매해 질 거고. 이론적으로는 다섯 시간 삼십 분짜리 곡을 하나 만들어 발표할 수도 있고, 1분짜리 곡 다섯 개를 엮어서 발표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까지의 앨범 형식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는 거겠지. 달마다 한곡씩 파일로 싱글을 내고 연말에 이건 이번년도의 작품집입니다 하며 묶어보는 사람도 나오겠지만, 듣는 사람들은 어차피 한 곡 한 곡 싱글로 임의재생해가며 들을 거야. 그저 대형마트처럼 묶음상품이니 조금 할인이 되는 걸 기대하고 사는 소비자가 있을까. 내 생각에 CD의 종말과 더불어 앨범도 종말을 맞이할 것 같아.”

  며칠전 다로와 함께 내게 찾아왔을 때 다로가 했던 얘기와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더군. 예전부터 인지는 우리 밴드의 두뇌였어. 대외적으로, 예를 들면 무대 위에서 시끄러운 건 다로지만, 다로가 떠들어대는 말의 대부분은 인지에게서 주워들은 거라는 사실을 기한과 난 알고 있었지. 인지는 애초에 남들의 주목을 받는 것에 그닥 관심이 없는 아이였거든.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드럼을 두드린다, 무대 뒤쪽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음악의 밑둥을 든든히 바친다, 이게 인지의 스타일이었지. 근데 지금은 예외적으로 자기가 직접 얘기를 이끌어 나간거야. 그만큼 중요한 일이란 걸 알리려는 듯이. 난 말없이 들으며 중간 중간 인지의 숨이 짧아 목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같이 침을 삼켰어. 그저 그녀가 말하는 걸 몇 시간이라도 좋으니 하염없이 듣고 싶어지더군. 다로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어떨까. 저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질까 아님 우리와 있을 때처럼 꼭 필요한 말만 던지고 입을 다물까. 애초에 다로는 그녀의 목소리가 이렇게 도발적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입만 살아 있는 성불구 같은 새끼가.

  “그래서 급히 풋라이츠를 다시 불러 모은 거야. 기억 나? 6년 전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보자고 난리쳤던 그 앨범? 이제 우리에게 시간이 별로 없어. 앨범이 소멸하기 전에, 음악사의 한 페이지에, 앨범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 넣어야지.”

  이렇게 말하며 인지가 우리의 얼굴을 천천히 둘러봤어. 웅장한 배경음악이라도 깔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지. 헌데 희한한 건 말야. 이런 비장한 순간이 오면 체질상 못 견뎌 흰소리로라도 딴죽을 거는 게 버릇이던 우리였건만, 이 때만은 아무도 웃거나 빈정대지 않았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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