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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uckmail] 음혈인간으로부터의 이메일
juckmail 2000_02_16


Title : 음혈인간(飮血人間)으로부터의 이메일(e-mail)


"juckmail@gigs.co.kr로 도착하는 수많은 메일 중에는 정말 기이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 세계에는 생각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가르쳐주는 메일들 중 하나를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 발신인의 어드레스 등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물론 발신인의 동의는 구한 상태입니다.)

또한 이 메일의 내용은 절대 대외비(對外秘)입니다.

다만, 이 분께 힘을 주고 싶으신 분은 juckmail@gigs.co.kr로 편지를 보내주시길...
저도 어떤 답장을 보내야 할 지 고심중이니까요." :




안녕하세요, 이적씨. 당신의 음악에 관심있던 차에, juckmail이란 걸 알게 되어 잘 받아보고 있습니다. 너댓 통의 적메일을 꾸준히 읽으니, 당신이라면 저의 고민을 듣고 공감해 줄 듯 하여 조심스레 첫 메일을 띄웁니다.

(중략...: 이 부분은 그가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망설였는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하고 있습니다. 맥락상 생략해도 무방할 듯: 적 註)

틀림없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저와 제 동료들은, 인간의 피를 마십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피를 하루라도 마시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휴...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도 걱정이 앞서는군요. 어쩌면 당신도 '흡혈귀' 따위의 몹쓸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당신이 이쯤에서 '미친놈...' 이라 중얼거리며 메일을 삭제해버리지 않기만을 빌 뿐입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흡혈귀'라는 이미지와 싸워왔습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조들도 수 백년, 아니 수 천년간 그토록 부당하게 '사악하고' '악마적인' 사람들로 매도되는 것에 대항해 왔습니다. 아시다시피 성과는 전무했지요. 그 때문에 지금까지 이렇게 비밀스럽고 비참하게 우리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하지요.

당신에게라도 외치고 싶습니다. 우리는 '흡혈귀(吸血鬼)'가 아닙니다. '鬼'가 아닐뿐더러, '吸血'도 하지 않습니다. '흡혈'이라는 것이 '영화에서처럼' 사람의 목에 이빨을 꽂고 피를 빨아대는 것이라면 말이죠. 물론 몇 백년 전까지 그런 행태가 간혹 존재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우리의 선조들 중 일부는 무고한 행인들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범죄'를 반복했었습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로 그러한 강제흡혈행위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정말입니다. 우리 역시 진화된 민주주의 체제 안에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입니다. 어찌 보면, 이 시대에 우리처럼 남들을 의식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드물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선조들 중 일부가 그러한 강제흡혈을 자행하던 시대를 돌이켜봅시다. 그때는 우리의 선조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잔인했던' 시대입니다. 전쟁을 하면 목을 베고, 벤 목을 마을에 1년씩 걸어놓아 구더기가 끓는 것을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바라보던 시대. 죄인의 사지를 말에 묶고 찢어 죽이는 '능지처참'을 한양 한 복판에서 가족용 쇼처럼 행하던 시대. 마녀랍시고 죄없는 소녀들을 잡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며, 믿음이 조금 다른 순교자들은 내장을 빼내고 손발톱을 뽑고 눈을 도려내던 시대. 그러한 인류 모두의 암흑의 시대에 우리 선조들 중 일부가 저지른 잘못은 도리어 소박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 물론 지금에 와서 그들을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말입니다.

얘기가 조금 다른 길로 샜군요. 지금 당신은 당연히 이러한 의문을 품게 되었을 테죠. '그렇다면 어떻게 인간의 피를 마시느냐?' 라는... 부끄럽지만, 우리가 피를 공급받는 몇 가지 방법을 말씀드리죠.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드리는 게 나을 듯 합니다...

첫째, 우리는 각종 병원들과 모종의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혈액은행과는 막역한 사이지요. 당신이 집에서 우유나 요구르트를 배달 받듯, 우리도 팩에 든 신선한 피를 공급받습니다. 물론 고도의 비밀 보안 장치 하에 말이죠. 수혈을 급히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로서도 고가의 비용으로 완전히 안전하고 위생적인 피를 공급받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에 쉽게 저버릴 수 없는 방법입니다.

둘째, 우리가 즐겨 찾는 바(bar) 혹은 카페가 국내에도 여러 곳 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처럼 피를 마시려고 오는 사람들이 60~70%, 반면 피를 뽑혀주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30~40% 정도 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세상엔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있지요. 피를 뽑히려고 오는 사람들은 피를 뽑히며 천상의 쾌감과 만족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요즘은 돈벌이 삼아 피를 뽑혀주는 젊은이들이 늘어 문제가 되고 있기도 합니다. 예전의 돈거래없는 순수한 관계들에 비하면, 이제는 바 전체가 하나의 사창굴 혹은 쇼핑몰같은 느낌을 주어 슬퍼집니다.

셋째, 집에서 피를 받아 마실 정도로 부유하지도 않고, 바나 카페같은 공공장소에 나오기도 꺼려하는 소심한 부류들은, 할 수 없이 다른 방법들을 이용합니다. 이들 중엔 같은 부류의 파트너와 한 집에 살며 서로서로 상대방의 피를 마시는 경우도 있고, 간혹 스스로의 피를 마시는 경우도 있습니다(비참한 노릇이지만). 또 어쩔 수없이 가축의 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 밖의 다양한 방법들을 다 상술할 순 없군요. 아, 혹자는 세계의 전쟁터들을 찾아다니며 나름의 방식으로 피를 모은다는데, 이런 모험가들은 극히 드문 경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평화적으로 우리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어느 누구보다도 바르고 건실하게 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은 우리를 극도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봅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지식은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를테면, 동유럽쪽 옛날 얘기나 듣고서, 우리가 십자가, 마늘 등을 끔찍이 무서워하고, 햇빛을 보면 온몸이 타들어간다는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뜻밖에 정말 많습니다. 이런 옛이야기를 믿을 바엔 차라리 산타클로스나 스머프를 믿는 게 나을텐데 말이죠. 굳이 답하자면, 우리 중엔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종교의 역할이 그런 것 아닌가요... 고단한 영혼에 안식을 주는.... 물론 종교인들이 이 사실을 알면 기겁하겠지만...). 또한 식성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같은 경우 고기와 함께 생마늘도 아주 즐겨 먹습니다. 마늘냄새 싫어하는 서양사람들이나 마늘을 피하겠죠. 그리고 햇빛. 이거야말로 정말 넌센스지요. 우리가 감광용 필름도 아닌 바, 화창한 햇살을 맞으면 기분 좋아지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에 대한 편견 중 또 하나는, 우리가 항상 피에 굶주려 피 마실 궁리만 하고 다닐 거라는 생각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한국 사회 평균치 이상으로 교육받고, 현재 각종 전문직에 광범위하게 진출해 있습니다. 우리의 성향과 지적능력의 관계는 검증된 바 없지만, 틀림없이 강력한 연관이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우리 중 다수가 고가의 의학용 피를 별 무리없이 고정적으로 살 수 있다는 건 그만큼의 경제력이 뒷받침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저 역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벌이는 시원치 않아도)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와 강의준비에 쏟지 멍하게 앉아 피 생각만 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백 배 양보하더라도 당신들이 일하면서 술생각 떠올리는 것보다도 훨씬 덜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악질적인 소문은 바로, 우리가 '병'을 옮긴다는 근거없는 루머입니다. '병'이 어떤 것을 말하는지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상징에 의한 공격이 조금 시들해지면서, 이제는 마치 우리가 인류의 생존에 실질적인 위협이라도 되는 듯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17,8세기 이전의 강제흡혈 시대라면 모를까, 위에 나열한 방식으로 피를 섭취하는 시대에 이 무슨 말도 안되는 마녀사냥이란 말입니까... 또한 우리의 성향이 '전염'된다는 생각 역시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성향은 '운명적'으로 주어질 지는 모르지만, 결코 '전염'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인류 안에 우리와 같은 존재가 항상 있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동등한 인격체로 보아주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이토록 손가락질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이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평생 자신을 숨기며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얼마나 지옥같은지는... 겪어보지 않은 당신들은 짐작도 할 수 없을 겁니다......

글이 예정보다 길어졌군요.... 사실 당신에게 이렇게 떠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답답한 마음에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다소 흥분하여 두서없는 글이 된 것 진심으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만, 부디 이 메일, 우리의 목소리에 당신이라도 귀기울여주시길 빌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자리에서 당신의 목소리로 우리의 현실을 노래하는 것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반가울 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미 당신의 노래 중에 몇 곡은 의외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작으나마 위로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우리도 언젠가 넓은 세상에 대고 '난 피를 마신다'라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들 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훨씬 더 많을 테지만.

그럼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답장은 감히 기대하지 않고 있지만, 만약 제 메일박스에서 당신의 답장을 발견하게 된다면, 저와 제 동료들은 잠시나마 무척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럼 안녕히.... 건강하시길... 무지개가 흐르는 피여...



2000년 2월 11일
당신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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