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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자를 먹는 그림책
  그날 아침 날씨는 종잡을 수 없었다. 비가 오다 해가 나다 다시 먹구름
이 몰려드는 것이 반복됐다. W출판사 편집부의 S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이런, 이제 서울은 아열대가 되는 건가?"
  사무실 직원들이 한꺼번에 S를 쳐다봤다. 그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험악
한 날씨 탓이라고 보기엔 심상치 않았다. S는 십수년의 직장생활에서 얻
은 직감으로 사고가 터졌단 걸 알았다. "뭐야, 말해봐. 이번엔 또 누구야,
얼마나 다시 찍어야 되는 건데!"
  한 직원이 쭈뼛거리며 옆 직원의 어깨를 툭툭 쳤다. 총대를 맨 그녀가
입을 뗐다.
  "저... 시중에 깔린 그림책들에서... 글자가 사라지고 있어요."

  종로의 대형서점에 들어서자마자 S는 어린이책 코너를 찾았다. 그림책
섹션의 그림책들을 하나씩 펼쳐보고 던지는 S씨에게 서점의 안내원이
다가와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손님, 저... 요즘 그림책들은... 아동들의 상
상력 배양을 위해 가급적 글은 생략하고 있답니다..." S는 중언부언하는
안내원을 뒤로 한 채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올랐다. '제길,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빠르잖아.'
  
  커피전문점의 창가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S의
전담작가 중 하나였다. "이봐요, S부장.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작가는 다
짜고짜 고함을 쳤다. "내가 그 양반이 일러스트한다 그랬을 때부터 맘
에 안 들었지만, 서로 양보할 건 양보하고 조정할 건 조정해서 잘 끝낸
책 아뇨! 근데 글을 싹 빼고 그림만 넣어서 풀어? 지금 나 엿먹이는 거
야?" S는 설명을 하려다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배터리를 빼버렸다.
갈 데가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K의 오피스텔 문 앞엔 이름을 알 수 없는 덩굴식물들
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초인종을 찾기도 힘들었다. 문을 두드리자
저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여기. 재주껏 들어와요." 문
을 열고 밀림과도 같은 덩굴과 나뭇가지들을 뚫고서야 작업용 책상에
앉은 K를 볼 수 있었다. "무슨 일로 왔는지 알아요. 내가 먼저 찾아가려
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K의 책상과 하체는 이미 덩굴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있었다. K의 작업대 위에선 그가 그리다 만 아마존 정글 그림이 사
납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거리로 나온 S의 옆으로 누군가 쏜살같이 뛰어갔다. 또다른 화백 M이었
다. S는 황급히 그를 좇아 뛰었다. 달리면서 물었다. "어떻게 된거요?" M
이 힐끔 쳐다보더니 헐떡이며 대답했다. "내가 그린 벌떼가 좇아오고 있
어!" 뒤를 돌아보니 잉크자국 같은 무수한 점들이 그들을 좇고 있었
다. "다음 달 말쯤 다시 연락하리다!!!" M과 벌떼는 모퉁이를 지나 사라졌
고 S는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강 둔치에서 S는 비밀리에 원로삽화가 Q와 만났다. 강물을 바라보며
Q가 말했다. "오래전부터 그림책의 그림들은, 지들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
한다고 불평해왔다는 거 알잖아.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지들이 언제나
글 뒤치닥거리나 하는 거 아니냐고 투덜거렸지. 그림에 맞춰 글을 써야
한다고. 아이들은 글보단 그림을 훨씬 더 좋아한다고. 글 따위 없어도 그
림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할 거라고, 늘상 주장해왔잖아. 이제 그림들 스
스로가 그날을 앞당겼을 뿐이야. 활자를 잡아먹는 그림책이란, 우리의 손
을 떠난 일이라구." S와 Q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가올 새해의 그림책
시장에 대해 얘길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 그들 뒤로 슬금슬
금 풀밭그림이 다가왔다. 이제 이 곳 역시 그림 만    나  ㅁ  ㅇ ㅡ   ㄹ
ㅅ  .     .                    .     ..

  

      
  
*그림과 함께 수록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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