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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삼매(讀書三昧)
  독서삼매(讀書三昧)


  그녀는 정원의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난 늦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부엌으로 가 물을 마시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 찾던 중이었
다. 정원 쪽 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흔
들의자 등받이를 뒤덮고 있었다. 의자는 끄덕거리다 이내 멈췄고, 잠시
후 잊었다는 듯이 다시 끄덕거렸다. 난 조용히 정원 쪽의 창문을 미끄러
뜨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불현듯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녀에게
몰래 다가가 깜짝 놀래켜주리라.

  정원의 초록색 공기를 밀어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사뿐히 즈
려 밟는 발걸음 밑엔 이미 죽은 꽃잎들이 가득했다. 난 두 손을 공중에
휘저으며 마치 헤엄을 치듯 앞으로 나아간다. 세 걸음이면 닿을 듯 하던
그녀의 뒷모습은 어쩐지 걸을수록 더 멀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이윽고
난 그녀의 바로 뒤에 설 수 있었다. 숨까지 참느라 눈앞이 어질거렸다.
적막한 정원엔 삐걱거리는 흔들의자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때 한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날려 내 가슴
을 간지럽혔다. 순간 은근한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제 그만 그녀
의 어깨를 잡고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고는 이 소박한 장난을 마치고 싶
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정원 안의
공기가 나무의 진액처럼 찐득찐득해졌고 난 수액 속에 갇힌 벌레 마냥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움직여 그녀를 내려다봤다. 흔
들의자마저 움직임을 멈추고 서있었고 그녀는 페이지도 넘기지 않은
채 책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난 그저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내 품에 안겨 내 가슴을 두드려주길 원했던 것뿐인데. 그녀는 이
미 책 속에 빠져 있었고, 그 세계는 너무 견고해 나의 침입을 봉쇄해버
리고 말았다. 난 장난을 칠 타이밍을 놓쳤고, 이제 억지로 몸을 꿈틀거
려 그녀의 세계를 부수면 그녀마저 유리병처럼 깨져 쏟아져 내릴 것이
라는 공포가 몰려왔다. 그렇다면 난 언제까지 이렇게 여기 서 있어야 하
는 걸까. 그녀는 언제쯤 독서를 그치고 뒤돌아 나를 발견하게 될까. 한낮
의 태양은 잔혹하게 우리를 내리쬐고 있었고, 그녀의 독서는 영원히 계
속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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