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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계령(外界靈)
  외계령(外界靈)


  나도 알고 있다. 외계에서 온 생명체에 대해 우린 이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것을. 한 인터넷 외계인 동호회의 통계에 의하면 작년 한해
전 국민의 3분의 1 가량이 외계생명체와 접촉했고, 그 중 24%는 그들의
모선으로 끌려가 각종의 실험, 혹은 수술의 대상이 되었다. 멀리 갈 것
도 없이, 나의 앞집에 사는 50대 아저씨는 충주호로 낚시를 떠났다가 외
계인을 만났고 결국 그들에게 강간을 당해 임신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이 방송에 소개되자 각종 매체에서 의학적 검증을
요구했는데, 어떤 산부인과 의사도 그에게서 임신의 징후를 찾아내지 못
했다. 당연하다. 외계아(外界兒)는 자궁이 아니라 혈관 내에 착상되며, 임
신기간은 120년에서 130년 정도 되기 때문에, 최소한 40년 정도 지날
때 까진 어떠한 외적 징후도 나타나지 않는다. 불행히도 인간의 수명이
100년이 채 안되기 때문에 그는 결국 그 태아를 출산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며, 그 사실로 인해 매일 밤 "아가야 미안해, 엄마를(혹은 아빠
를) 잘못 만나서..." 밤잠을 못 이루고 통곡하는 것이다. 라고 그는 나
와 동네 치킨호프에서 술을 마실 때마다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이런 와중에 시덥지 않은 외계뭐시기에 대한 얘기를 덧붙이는 것은 어
느 모로 보나 유행에 뒤떨어진 일 같다. 하지만 나로선 그에 대한 얘기
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어쨌거나 이건 내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사
실, 외계뭐시기에 대한 사례 중 전대미문의 것이어서 내게 방송출연의
기회나, 뭐 까놓고 말하자면, 약간의 돈벌이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도 있
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자, 내게 찾아온 것은 외계령(外界靈)이다. 음. 이해한다. 조금은 낯선 존
재일 것이다. 그래서 설명을 덧붙이려는 것이다. 외계령은 아무런 형체
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순수한 스피릿, 영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러
니까,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라는 것이다. 이 영
은 외계로부터 와서 지구와 지구생명체들을 탐구하려 한다. 내 생각에
이들은 육신의 형태로는 수백만 광년의 거리를 도저히 물리적으로 단시
간에 여행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영의 형태로 지구에 도달한 것 같
다. 그리고 어떤 알 수 없는 좌표설정과정에 따라 지금으로부터 4년 전
나의 집에 도착하고 만 것이다.

  내가 처음 외계령의 존재를 인지한 것은 어느 가을 날 오후였다. 베란
다에 빨래를 널어놓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검정 양말 하나가 뚝 하고 바
닥으로 떨어졌다. 별 생각 없이 다시 빨랫대에 걸어놓고 돌아서는 순간,
검정 양말이 이번엔 점프하듯이 휙 뛰어올라 거실 마루에 떨어졌다. 바
람이 이리 부나, 중얼거리는 내 눈앞에서, 검정 양말은 엄청난 속도로 마
루를 미끄러져 내 방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 그때 내가 느낀 공포
를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난 공포를 꾹꾹 누르고 양말을 뒤
쫓아 방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온 나를 본 검은 양말은 모퉁
이에 처박히더니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흠, 그렇게 센 놈 같진 않은
데?난 슬금슬금 양말을 압박하며 구석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결정적인
틈을 타 양말을 콱 밟아버렸다. 순간 검정 양말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났고, 양말은 다시 평범한 젖은 양말로 돌아와 있었다.

  두 번째로 외계령이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쯤 뒤였다. 이번엔 내
호돌이 인형에 깃들었다. 어느 일요일 늦잠을 자고 있는데, 장식장에서
뭔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계속 자
는 척하며 실눈을 뜨고 장식장을 슬쩍 엿보았다. 그곳에선 88올림픽을
앞두고 아버지가 사주신 호돌이 인형이 유리문을 열고 나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난 직감적으로 지난번 그 놈이 돌아왔단 걸 느꼈고, 이번
엔 더욱 침착하게 조용히 일어나 장식장 유리문을 확 열어제꼈다. 중심
을 잃은 호돌이 인형은 이불 위로 거꾸로 떨어졌다. 난 재빨리 인형의
두 귀를 잡아 그 영이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친절한 말투로 소리쳤
다. "가만히 있거라! 널 해치지 않아! 난 나쁜 놈이 아니야, 너도 나쁜 놈
같지 않으니, 진정해! 진정하면 그대로 놓아줄게." 호돌이는 겁에 질려 파
르르 떨다가 이내 사태를 파악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기분이 좋아
져 찍어눌렀던 두 손에 힘을 뺐다. 그리고 우리 둘은 이불 위에 앉아 서
로 마주보며 두 시간 정도를 아무 말 없이 있었다.

  외계령은 그때 내게 많은 얘기를 한 것 같다. 아니, 어떤 소리를 낸 것
은 아니다. 그렇다고 TV에서 본 텔레파시처럼 내 머릿속에만 울리는 목
소리가 들렸던 것도 아니다. 외계령은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것 같지 않
다. 다만, 내 마음속에, 그에 대한 정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도와
주는 것 같았다. 그 두 시간 동안 난 외계령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
다. 무엇보다 그 영이 외계에서 온 것이라는 점, 그리고 나와 이 지구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밖엔 또, 음,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도 그 외계령에게 지구에 대해 무언가 가르쳐주고 싶었지
만, 나 자신 지구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
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호돌이는 다시 그냥 호돌이 인형으로 돌아와 있
었다.

  그 후에도 잊을만하면 외계령은 내 집안의 무언가에 깃들곤 했다. 몇번
은 TV 리모콘에 들어왔는지 제멋대로 채널이 돌아갔다. 난 외계령이 그
러한 방식을 통해 지구인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 학습하려한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컴퓨터가 갑자기 다운되거나 인
터넷이 순간적으로 멈춰버릴 때도 난 외계령이 모종의 연구와 실험을
행하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기꺼이 자리를 피해줬다. 우린 점점 익숙해
졌고, 마치 한 가족처럼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사이가 되었
다. 이제 펜이나 가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거나 즐겨 입던 티셔츠가
갑자기 사라졌다해도 난 전혀 놀라지 않는다.

  외계령은 언젠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난 외계령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떤 모습일까 그려보곤 한다. 잘 생긴 청년일까, 혹은 우아
한 여인일까. 아님 영화에 나오는 에일리언들처럼 흉물스러운 모습일까.
어쩌면 그 곳에서도 영의 형태로 이런 저런 무생물에 깃들어 살아나가
는 것일지도 모른다. 외계령이 생명체에 깃들어 그것을 조종하지 않는다
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이 문명화되어 타종족의 생존권을 존중한다는 의
미일 것이다. 당연히 외계령의 세계는 무척이나 예의바르고 평화로울
것 같다.

  다음엔 외계령이 내 집안의 어디에 깃들지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발견
하지 못하는 동안엔 그 영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수도배관이나 전기배선에 들어가 기력을 보충하는지도 모르지. 선풍기
나 김치냉장고로 들어가 더위를 식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약속
한다. 다음에 외계령이 또 나타났을 땐, 여러분이 볼 수 있도록 꼭 방송
국 카메라를 부르겠다.  헌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다. 외계령이 워
낙 예민해서 낯선 사람들이 들이닥치면 금세 어딘가로 도망쳐버릴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설혹 그렇게 되더라도 외계령에 대한 나의 이야기
는 추호도 거짓이 없는 진실이라는 것은 믿어주기 바란다. 나도 솔직
히 외계아를 임신했다는 앞집 아저씨의 측은한 얘기는 믿지 않지만, 맹
세하건대, 내 얘기는 진실이다. 단지 카메라에 담거나 과학적으로 증명
하기가 조금 힘들뿐이다. 여러분이 끝내 내 얘기를 믿지 않는다면, 돈벌
이가 되고 안되고와 상관없이, 난 조금 더 외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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