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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낡서바] 환풍기
  환풍기가 돌고 있다. 오렌지빛. 세워보지 않으면 도대체 날개가 몇 개인지 알 수 없겠다. 어쩌면 본래의 색깔은 오렌지빛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기 때문일까? 뻑뻑해진 이빨에서 폐속까지 연기가 자욱히 낀 것 같다. 숨을 쉬려 할 때마다 몸이 뒤로 젖혀진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난 오렌지빛환풍기에 시선을 붙인 채로 이렇게 허연, 배수구가 막힌 소변기 앞에 서 있다. 나프탈렌 냄새와 환풍기소음과 내 손의 부스럭대는 소리가 좁은 화장실 안에 남아있다. 그 외엔 내 어깨를 받아줄 하얀 벽들뿐이다. 하얀 벽은 자꾸 희미해져 원근을 알 수 없게 한다. 때문에 더욱 나는 오렌지빛환풍기를 바라본다. 점점 파고든다. 이 흰 방밖의 세계에서 떠들썩하게 들려오는 노래들이 잠깐씩 문틈으로 기웃거리다 돌아간다. 내 웃음을 두고 온 자리. 이 흰 방을 나가면 난 내 의자에 올려두었던 웃음을 틀니처럼 이빨에 끼우고 다시 술잔과 전등과 사람들을 달고 있어야 한다. 돌아갈 수 있을까? 배뇨의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 환풍기는 잠시 속도를 늦추는 듯하다가 다시 맹렬히 돌고 있다. 더욱 커진 것 같다. 오렌지빛.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몇 번의 시도를 더 하더니 돌아간 듯하다. 그는 누구였을까? 구역질을 하려한 어린 학생이었을까? 내 술을 나눠 마신 그였을까? 우린 서로가 누구인지 확인 않고 문 하나를 두고 대결했다. 결국은 내가 이겼다. 그는 돌아갔고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젠장. 방광의 긴장이 가중된다. 그는 누구였을까? 나와 한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들은 누구일까? 환풍기가 돌고 있다. 코 속 깊은 곳에 담배꽁초가 박혀있는 것 같다. 배뇨가 시작되려 한다. 오렌지빛환풍기는 더욱 빠르게 돌고 있다. 어느 정도의 속도일까? 선풍기만큼..아니면 영화 속의 살인 무기 프로펠러만큼. 덜덜덜거리는 소음이 점점 부드러워진다. 환풍기는 아무런 원한 없이 돌고 있다. 환풍기가 멈추는 날. 이 흰 방의 모든 것은 정지할 것이다. 시간까지도. 배뇨가 시작된다. 감전된 듯한 떨림. 난 한 가지 느낌에 집중할 수 없다. 내 긴 손가락. 환풍기는 날 유혹한다. 멈출 수 있을까? 손가락이 날개사이를 찾아 다가간다. 날개를 볼 수 없다. 손가락이 회전의 진동을 느낀다. 멈출 수 있을까? 배뇨는 계속된다. 내 긴 손가락이 오렌지빛환풍기를 멈출 수 있을까? 환풍기는 더욱 빠르고 커진다. 몸의 중심을 잃었다. 내 손가락. 짧은 비명과 함께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끝이 떨어져나갔다. 마른 손가락이 잠시 커다랗게 부풀더니 이내 날아가 버린 끝에서 피를 뿜어댄다. 끈적거리는 검붉은 피. 배뇨가 계속된다. 피는 두려울 정도로 뿜어 나온다. 손가락을 어찌해야 좋을까? 새하얀 벽에 피가 뿌려진다. 핏자국으로 이 작은 방을 선명히 알 수 있다. 피는 바닥을 흐르고 점점 분출의 강도가 세진다. 환풍기도, 피도 멈추지 않는다. 어지럽다. 이마를 찬 벽에 대야 한다. 난 그렇게 서 있다. 이제 손가락은 마지막 한 방울씩을 떨어뜨린다. 말라비틀어진 가죽 껍데기만 남아있다. 축 늘어진 손가락. 끝났다. 기침이 목을 흔든다. 이제, 다시 저 밖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오렌지빛 환풍기가 여전히 돌고 있다. 난 돌아가야 한다. 그들에게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도 이 환풍기를 보게 될까. 내겐 아직 아홉 개의 손가락이 남아있다.


                          
                                                                                                     3월 20일 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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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3월 20일이라고만 써있군요. 아마 93년일 듯.
환풍기라는 제목으로 2002년에 이 게시판에 올린 글도 있는데
이건 그로부터 10년 전의 원안.
이 원안을 잃어버리고 기억나는 대로 쓴게 2002년 버전이었는데,
되찾고 보니 사뭇 다르군요. 공기가.
역시 그저 뒤적이다 불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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